삶의 기준이 사라진 시대에 던지는 태고의 질문 -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으로 읽는 현대 사회(39)

표류하는 현대인을 위한 도덕적 나침반의 재발견

자율이라는 이름의 감옥에서 벗어나 규범의 자유로 나아가기

존재의 이유를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서의 순종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39문

 

Q. 39. What is the duty which God requireth of man? A. The duty which God requireth of man, is obedience to his revealed will. 
문 39.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본분은 무엇입니까? 답.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본분은 그가 나타내 보이신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 

 

AI 이미지 (제공: 미디어 울림)


포스트모더니즘의 파고가 휩쓸고 지나간 현대 사회에서 '의무'나 '본분'이라는 단어는 마치 박물관의 유물처럼 취급받곤 한다. 개인이 모든 가치의 척도가 된 시대에 누군가 나에게 무엇을 요구한다는 사실 자체를 불쾌하게 여기는 이들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무한한 자유의 메시지 속에서 현대인은 유례없는 정체성의 혼란과 도덕적 공허함을 경험하고 있다. 기준이 사라진 자유는 자유가 아니라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뗏목 위의 고립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39문은 바로 이 지점에서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좌표를 재설정한다. 인간이 무엇을 해야 하는 존재인지, 즉 '본분'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규정함으로써 우리 삶의 흩어진 조각들을 하나의 목적으로 수렴시킨다.

 

'본분'은 라틴어로 'Officium(오피치움)'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는 단순히 강요된 노동이 아니라 존재 목적에 부합하는 마땅한 도리를 의미한다. 성경은 인간을 자율적인 신(God)으로 정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창조주와의 관계 안에서 비로소 완성되는 의존적 존재로 묘사한다. 17세기 신학자들이 사용한 'Requireth(요구하다)'라는 단어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정당하게 청구하시는 권리를 뜻한다. 이는 마치 정교한 기계를 만든 설계자가 그 기계의 올바른 작동법을 요구하는 것과 같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가장 인간답게 구동되기 위한 매뉴얼,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본분인 순종이다.

 

순종을 뜻하는 헬라어 '휘파코에'(ὑπακοή, 아래에서 듣다)는 단순한 굴종이 아니라 '귀를 기울여 경청함'을 전제로 한다. 현대 심리학적 관점에서 볼 때, 건강한 권위에 대한 순종은 자아의 붕괴가 아니라 오히려 자아의 확장을 가져온다. 

 

에리히 프롬(Erich Fromm, 1900-1980)이 지적했듯이, 인간은 '~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를 얻었지만 '~를 위한 자유'(Freedom for)를 잃어버렸다. 소요리문답은 우리가 순종해야 할 대상을 '계시된 뜻'(Revealed will)으로 명시한다. 이는 인간의 사색이나 철학적 추론으로 만들어낸 도덕 체계가 아니라, 창조주가 직접 소통하신 객관적인 기준이 존재함을 시사한다.

 

 

비즈니스 세계에서도 이 원리는 유효하다. 기업의 지속 가능성은 구성원들이 각자의 취향이 아닌, 공유된 가치와 원칙에 얼마나 정렬되어 있느냐에 달려 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은 영적인 정렬이다. 나의 야망과 욕망을 하나님의 통치 아래 두는 작업은 인생의 불필요한 마찰 비용을 줄여준다. 미가 선지자가 노래했듯이, 그 순종의 내용은 거창한 종교적 의식이 아니라 정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일상의 실천이다(미 6:8). 이것이 바로 인문학이 추구하는 '선한 삶'의 실체이자 신학이 말하는 '순종의 본질'이다.

 

결국 순종은 속박이 아니라 보호다. 기차가 철로 위를 달릴 때 가장 자유롭듯, 인간은 하나님의 법이라는 궤도 위에서 가장 안전하고 역동적이다. 현대인이 겪는 수많은 심리적 부적응과 윤리적 타락은 이 궤도를 이탈한 결과물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불가능한 짐을 지우시는 독재자가 아니라, 우리가 가장 행복해지는 길을 미리 계시해주신 사랑의 아버지이시다. 따라서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것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고귀한 특권이자, 상실된 인간성을 회복하는 유일한 열쇠가 된다.

 

현대 사회는 '자기 결정권'을 신성시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그 결정을 내리는 '자기'가 누구인지 그 정체성에 대해서는 답을 주지 못한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39문은 우리가 누군가에게 응답해야 하는 존재인지를 깨닫게 한다. 진정한 자유는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나를 만드신 분의 목적에 맞게 사는 것이다.

 

우리는 일상에서 '내 뜻'과 '그분의 뜻'이 충돌할 때, 기꺼이 그분의 뜻에 귀를 기울이는 '휘파코에(순종)'의 자세가 꼭 필요하다. 아이러니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바로 그런 순종의 자세가 우리를 가장 빛나게 해줄 것이다.

 

 


허동보 목사 | 수현교회
저서 | 『왕초보 히브리어 펜습자』, 『왕초보 헬라어 펜습자』, 『왕초보 히브리어 성경읽기』, 『고난, 절망의 늪에서 피어난 꽃』, 『부와 기독교신앙』, 『그와 함께라면』, 『만남』, 『AI시대, 히브리어로 답하다』 외

 

 

 

작성 2026.03.04 10:32 수정 2026.03.04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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