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된 복종이 아닌 사랑으로 쟁취하는 평화의 주권 -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으로 읽는 현대 사회(26)

법의 지배를 넘어 사랑의 질서로 공동체를 보존하는 통치

보이지 않는 적들의 공격으로부터 영혼의 성벽을 사수하는 방어

지배하는 군주에서 섬기는 군주로 전환되는 리더십의 패러다임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26문

 

Q. 26. How doth Christ execute the office of a prophet? A. Christ executeth the office of a king, in subduing us to himself, in ruling and defending us, and in restraining and conquering all his and our enemies.
문 26.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왕의 직분을 수행하십니까? 답. 그리스도께서 왕의 직분을 수행하시는 것은 우리를 자신에게 복종시키시고 우리를 다스리며 보호하시고, 자기와 우리의 모든 원수를 막아 이기시는 것입니다.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시 110:3)
대저 여호와는 우리 재판장이시요 여호와는 우리에게 율법을 세우신 이요 여호와는 우리의 왕이시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실 것임이라(사 33:22)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 하시리니(고전 15:25)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 14:13-14) 

 

AI 이미지 (제공: 미디어 울림)

 

인류의 역사는 곧 권력의 역사였다.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 1588-1679)'가 묘사했듯,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에서 인간은 자신을 보호해 줄 강력한 '리워야단(Leviathan)', 즉 왕을 갈구해 왔다. 그러나 역사가 증명하듯 땅 위의 왕들은 대개 군림하며 착취했고, 그들의 왕국은 영원하지 않았다. 권력은 집중될수록 부패했고, 통치는 억압으로 변질되기 일쑤였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26문이 제시하는 그리스도의 '왕' 직분은 가히 혁명적이다. 그것은 물리적인 칼의 지배가 아니라, 영혼의 중심을 다스리는 '소프트 파워(Soft Power)'의 원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왕의 직분을 수행하시는 첫 번째 방식은 '우리를 자신에게 복종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복종'이라는 단어는 자칫 거부감을 줄 수 있으나,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지극히 인문학적인 '해방'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무언가의 노예로 살아간다. 그것이 자신의 통제되지 않는 욕망이든, 타인의 시선이든, 혹은 끊임없는 불안이든 말이다. 자아는 결코 중립적이지 않으며, 늘 어떠한 강박과 충동에 휘둘린다. 그리스도의 왕권은 우리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파괴적인 우상들로부터 우리를 탈취하여 그분의 온유한 통치 아래 두는 '거룩한 정복'이다. 이는 라틴어로 '수비치오(Subiicio)'라 하며, 무질서한 존재를 올바른 질서 아래 위치시킨다는 뜻을 내포한다.

 

두 번째로 그리스도는 우리를 '다스리며 보호'하신다. 정치학적 관점에서 통치의 핵심은 '법치(Rule of Law)'와 '복지(Welfare)'다. 그리스도는 그분의 말씀이라는 하늘의 법으로 우리를 다스리신다. 이 법은 정죄하기 위한 법이 아니라, 생명을 보존하기 위한 가이드라인이다. 또한, 왕으로서 그분은 백성의 안녕을 책임지신다. 경영학적 리더십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 중 하나인 '심리적 안전감'은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서 극대화 된다. 구성원이 리더의 보호를 확신할 때 비로소 최고의 역량을 발휘하듯, 성도는 그리스도의 보호하심 속에서 세상의 풍파를 견뎌낼 정서적 기반을 얻는다. 그분은 우리를 다스리되 종처럼 부리지 않으시고,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어 백성을 지키는 '목자적 통치'를 수행하신다.

 

세 번째는 '원수를 막아 이기시는 것(Restraining and conquering all his and our enemies)'이다. 고대 근동의 왕들에게 부여된 가장 막중한 임무는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성벽을 사수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왕권은 우리를 위협하는 실존적인 대적들, 즉 죽음의 공포, 죄의 유혹, 그리고 악한 영적 세력들을 억제하고 정복하신다. 여기서 '막으신다(Restrain)'는 표현이 흥미롭다. 이는 원수의 활동을 완전히 제거하기 전이라도, 그들이 우리를 해치지 못하도록 그 영향력을 제한하고 통제하신다는 뜻이다. 비즈니스 환경에서 리더가 외부의 악의적인 공격이나 시장의 위협으로부터 조직의 핵심 가치를 방어해내는 전략적 수호자의 역할을 하는 것과 흡사하다.

 

 

그리스도의 왕권은 역설의 미학을 가진다. 그는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 군마가 아닌 '어린 나귀'를 타셨다. 이는 세상의 권력이 추구하는 위압적인 카리스마를 거부하고, 겸손과 평화로 통치하는 새로운 왕의 모델을 제시한 것이다.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가 분석한 권력의 감시와 처벌 시스템과는 대조적으로, 그리스도의 통치는 내면의 자발적 헌신을 이끌어내는 사랑의 감화력에 기초한다. 그분은 강제로 굴복시키는 군주가 아니라, 우리를 대신하여 고난을 받으심으로 우리의 마음을 얻으시는 '고난받는 종의 왕권'을 행사하신다.

 

이를 경제학적으로 보면, 그리스도의 왕권은 '평화의 배당금(Peace Dividend)'을 제공한다. 전쟁과 갈등이 멈출 때 경제가 번영하듯, 그리스도의 통치가 임한 영혼은 내면의 전쟁이 그치고 '샬롬(שָׁלוֹם)'의 번영을 누린다. 그분은 우리 삶의 자원을 낭비하게 만드는 죄의 소모적인 구조를 혁파하시고, 영원한 가치를 향해 우리의 에너지를 집중하게 하신다. 이는 가장 효율적인 인생 경영의 길이며, 최고 경영자이신 그리스도께 우리 삶의 경영권을 이양할 때 얻게 되는 유익이다.

 

그리스도의 왕직은 우리 존재의 무정부 상태를 끝내고, 진정한 주권자가 누구인지를 선포하는 사건이다. 우리는 스스로의 왕이 되어 스스로를 책임지려 할 때 가장 고통받는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나의 왕이 되실 때, 우리는 비로소 그분의 다스림 안에서 안식하며 그분의 보호 아래서 담대해질 수 있다. 그분의 왕권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며, 우리가 낮아진 지위에 있을 때나 승리의 자리에 있을 때나 변함없이 우리를 향한 선한 주권을 행사하신다. 대적들이 아무리 거세게 몰아쳐도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이미 세상을 이기셨기에, 우리는 그분의 나라 안에서 가장 안전한 시민으로 살아갈 수 있다.

 

현대인은 특히 '주권'에 매우 민감하다. 내 인생의 주인은 나라는 선언이 최고의 가치로 추앙받는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우리는 여전히 중독과 불안, 비교의식이라는 폭군에게 통치당하고 있다.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것이 진정한 자유라는 소요리문답의 가르침은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실존적 역설'이다. 진정한 리더십은 지배하는 힘이 아니라 보호하는 힘에서 나오며, 진정한 승리는 적을 멸하는 것이 아니라 적들의 적의(敵意)를 무력화하는 사랑에서 나온다.

 

지금 당신의 마음 보좌에는 누가 앉아 있는가?

 

 

 

허동보 목사 | 수현교회
저서 | 『왕초보 히브리어 펜습자』, 『왕초보 헬라어 펜습자』, 『왕초보 히브리어 성경읽기』, 『고난, 절망의 늪에서 피어난 꽃』, 『부와 기독교신앙』, 『그와 함께라면』, 『만남』 외

 

 

 

작성 2026.02.14 17:01 수정 2026.02.14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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